최근 막을 내린 세계선수권에서 자약룰을 어겨 귀신같은 3A+3T가 무효처리 됨에 따라 메달을 놓친 노부나리 오다. 오다의 경우 이런 식으로 포디움을 놓친게 한 두번 있었던 일이 아니라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지만, 참 안타까웠다. 심지어 본인은 점수가 나오기 전까지도 눈치를 채지 못한 듯해서 더욱 그랬다. 기본적으로 운동 선수로서 경쟁 경기에 나서는 이상 기본적인 룰을 숙지하는 것이 필수거늘....








<오다의 분전에 격하게 기뻐하는 코치들>
그런데 댓글에 재미있는 제보(이안님의 제보)가 있었다. 제냐는 자약룰을 어기고도 은메달을 따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제냐는 예브게니 플루쉔코의 러시아식 애칭으로, 야구딘과 함께 2000년대 초반의 남성 싱글을 양분했던 위대한 스케이터다. 실제로 두 명이 동시에 출전한 대회에서는 한 번도 빠짐없이 금, 은메달을 나누어 가졌기에, 다른 선수들은 동메달을 놓고 경쟁해야만 했다. 피겨 사상 가장 후덜덜한 라이벌이었다고 대다수의 사람이 이야기 할 정도인데, 그런 제냐가 자약룰을 어겨 은메달을 따냈다니 흥미로웠다. 사실 자약룰을 어겼음에도 은메달을 따낸 것 보다는, 제냐 정도의 선수인데 자약룰 어긴 것 따위(;) 때문에 은메달을 따냈다는게 더 신기할 정도였다. 그럴만큼 제냐는 엄청난 선수였으니까. 오다의 경우 자약룰을 어기지 않았어도 동메달을 따내는 정도였겠지만, 제냐는 그렇지 않았다. 예를들어 2009년의 세계 선수권에서 김연아 선수가 보여준 것처럼 압도적인 모습이라면, 사실 자약룰 조차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에서의 챈도 점프 하나쯤은 무효처리 되었어도 우승하는데 지장이 없었을 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것저것 자료를 뒤져보았다. 꽤 오래전 자료라 뒤지는데 애 좀 먹었다.

해당 경기는 2003-04 그랑프리 파이널이다. 1위는 엠마누엘 산두이고, 2위가 제냐다. 점수차이는 그닥 크지 않다. 뭔가 이거 파볼만한 가치가 꽤 많은 결과지라는 걸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정보가 여기에만도 꽤 많다. 제프리는 기권했고 ㅠㅠ 자신의 점프 강의에 김연아 선수 플립, 러츠를 교과서적 예로 들어 화제가 되기도 했던 마이클 와이스도 눈에 띈다. 송 가오라는 선수도 눈을 끄는데, 중국이 은근히 우수한 남자선수를 꾸준히 배출해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즘엔 난송이 아주 유망해 보이던데, 기대중이다.
어찌되었든, 제냐를 이긴 엠마누엘 산두는 흔히 궁신-_-; 으로 불린다. 웃긴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은 매우 뛰어난 선수였고, 표현력도 훌륭했다. 경기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제냐의 자약룰 위반과 상관없이 3위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큰 차이의 점수를 받아갔음을 알 수 있다. 각각의 프로토콜을 보자.
먼저 쇼트 프로토콜부터.

쇼트는 제냐가 1위로 마쳤다. 첫 점프에서 착지가 좋지 못했는지 연결 점프를 붙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의무감점 3점을 받았다(쇼트 프로그램에서는 컴비네이션 점프를 반드시 한 번 뛰어야 한다.). 3A의 수행은 훌륭했던 모양이고, 나머지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선수들이 받아가는 점수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낮은 듯한 인상인데, 일단 이 당시에는 트리플 악셀 이상군의 점프에 대한 기초점 자체가 상당히 저평가 되어있었고(4T 8점은 좀 심하다), 신채점제가 도입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대부분의 선수들이 비점프 요소에서 제대로 레벨을 챙기지 못했다. 제냐의 프로토콜만 봐도 죄다 레벨 2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하나하나 쌓이면 상당히 큰 점수가 된다.

다음은 엠마누엘 산두의 쇼트 프로토콜. 엠마누엘의 경우 4T에 3T를 붙였으나, 착지가 매끄럽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2가 주로 많고 -3도 두개나 있는 걸로 봐선 아슬아슬하게 스텝 아웃을 하거나 했지 싶다. 3A에서도 약간의 감점이 있고, 3Lz에서도 그닥 좋은 가산점을 받지 못했다. 기초점만 놓고 보면 엠마누엘이 5점 가까이 높지만, 가산점에서 신통치 않았던데다 PCS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제냐에게 1위를 내준다.

자. 제냐의 자약룰 위반이 여기서 등장한다. 그런데 한 번 실제로 프로토콜을 뜯어보고나면,
????????????????????????? 저게 왜 무효처리되었지 ???????????????????라는 생각이 드실 것이다. 그렇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자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프로토콜이다. 나도 처음에 보고 벙쪘다. 흠, 컴비네이션 점프를 네 번 뛴 것도 아니고, 중복해서 뛴 점프는 4T밖에는 없고.
-_- 무엇이 문제더냐!!!!!!!!!!!!!!!!
하는 수 없이 난 다시 당시의 규정집을 뒤져보았다.
There may be up to two jump combinations or jump sequences in the Free program.
지금과 규정이 다르다. 즉, 당시에는 프리 프로그램에 컴비네이션 점프를 최대 두 개만 넣을 수 있었던 것. 그러므로 마지막에 뛴 3A+2T는 무효가 된 것이다. 수행도 훌륭했던 듯 한데, 이로써 (당시 점수 기준) 8.8점짜리 점프가 날아갔다. 여기에 2T를 붙이지 않고 7.5점만 챙겨갔더라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승. 그런데 여전히 뭔가 석연찮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제냐가 낼 수 있는 점수차이 치곤 좀 적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자약룰 위반으로 인해 점프가 무효처리 된 것과 플립에서의 약간의 감점을 제외하면 모든 요소를 훌륭하게 수행해낸 듯 한데 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규정집을 혹시나 해서 뒤져봤더니,
-_-
MEN – senior category – Free Program
• maximum of 8 jump elements (including an Axel type jump)
-_-; 저 자약룰 위반과 상관없이 제냐의 프로그램에는 점프 한 개가 아예 부족하다. 프로토콜을 다시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최대 8개 가능한 점프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수행한 점프 요소가 7개다. 헐.... 어차피 컴비네이션 점프로는 더이상 못 붙이니까 3A을 단독으로 뛰고, 3S를 한 번 더 뛰었다면(다른 트리플은 뛸 수 없다. 그러려면 컴비네이션으로 붙여야 하는데 그러면 컴비네이션 최대 개수를 초과해버린다.) 4.8점(당시 3S는 4.8점)을 추가해 트리플 악셀과 함께 최소 12.3점을 챙겨가는 것인데..
구성에 있던 점프를 안뛰고 스킵했을리는 없을 것 같고, 그럼 애초에 프로그램을 잘못짜왔다는 뜻인가? 3A에 붙인 2T의 경우는 즉흥적으로 뛴거라 치더라도... 흠. 어쨌든 제냐로서는 좀 황당했을 듯하다.

엠마누엘의 프로토콜을 보면 확실해진다. 점프 요소의 개수가 8개다. 이러니 기본적으로 차이가 날밖에... 심지어 자약룰 위반으로 컴비네이션 하나까지 날려먹었으니. 사실 엠마누엘도 3S를 더블처리했기 때문에 뭐 그렇게 큰 차이는 없긴 하다. 제냐가 이런 저런 헛점을 보이며 우승을 내주긴 했지만, 엠마누엘의 프로그램도 충분히 후덜덜하다. 4T+3T, 3A+3T, 3A가 들어있는 구성이라면 우승을 거머쥐어도 이상하지 않을 구성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냐가 컴비네이션을 놓치지 않았더라도 상당히 박빙의 승부가 되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다.
본인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겠지만, 사실 자약룰을 위반하고도 은메달 씩이나, 그것도 3위랑 약 20점에 이르는 점수차이를 내며 가져가는 건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이다. 내가 당시에 제냐와 같은 경기에 나서는 선수였다면 기가 팍 눌렸을 것 같다. 그 경기에 야구딘까지 나온다면 말할 것도 없고.
그나저나 프로토콜을 보면서 느낀 점인데, 점프에 대한 기초점이 지금과 상당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트리플 군의 점프들의 기초점도 지금과는 상당히 다르고, 쿼드군의 점프도 지금에 비해 훨씬 낮다.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신채점제가 만들어졌을 당시의 기초점을 첨부해본다.

더블악셀을 제외한 트리플 5종의 기초점이 모두 다소 높게 책정되어있었고, 트리플 악셀을 포함한 모든 쿼드 점프의 기초점이 매우 낮게 책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T 8점은 인간적으로 좀 심한 것 같다. 4S 8.5는 말할 것도 없고. -_-; 점프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기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4회전 점프는 피겨의 중요한 한 축인 기술 측면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절한 평가와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건 좀 아닌 듯.. -_- 뭐 사실 저렇게 변변치 않은 보상임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저 시절에 우승하려면 쿼드 점프가 필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건 현재 기준이다. 기본 기초점의 오른쪽에 있는 굵은 글씨의 점수는 underrotated 판정 받았을 때 가져가는 70%의 기초점이다. 트리플 점프들의 기초점이 전반적으로 하향조정되었고, 당시와 비교해 볼 때 특히 토룹과 살코, 그리고 플립에 대한 조정이 좀 많이 일어났다. 토룹과 살코는 어느정도 동의하지만 플립은 솔직히 좀 동의하기 힘들다. 토룹, 살코, 룹 정도 까지는 대부분의 선수가 구사할 수 있고, 플립부터가 상위권 선수를 가르는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건 좀 지나친 저평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플립 5.8, 러츠 6.2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쿼드러플 점프에 대해서는 아주 확실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저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본다. 더블 점프와 트리플 점프간에는 세 배 가까운 점수차이가 나는 데 반해 쿼드러플 점프에 대한 평가가 그동안 너무 박했던 것이 사실이다.



덧글
에이미 2011/05/20 13:23 # 답글
안녕하세요, 얼마전에 링크해뒀는데 이제 인사드리네요^^제냐가 콤비하나 뛰고 은메달 땄던 게 저 경기군요. 제냐가 바보짓(...)을 해서 2등했던 적이 있다고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비교해보니 재미있네요. 확실히 쿼드 점프 기초점을 올리는 건 옳다고 보여요. 러츠와 플립 점수도 올리면 좋을텐데 그 점이 아쉬워요.
수달 2011/05/20 13:54 #
안녕하세요 ^^ 처음에 포스팅하려고 했을 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내용이 길어졌어요....ㅋㅋㅋㅋ 룰 변경 같은걸 다시 다 뒤져서 찾아보고 하느라....ㅋㅋ점프 기초점은 계속해서 조금씩 조정되는 듯하니 앞으로를 지켜봐도 좋을 듯합니다. 러츠 플립의 점수는 아무래도 지금 점수로는 좀 낮은 감이 있다고 봐요.
아트걸 2011/05/20 14:32 # 답글
정말 포스팅에 공 많이 들이셨을 것 같네요. 덕분에 저 같은 사람이 재밌게 잘 읽고 가는 거겠지요. ^^오천원을 꺼내려다가 관뒀습니다. ^^; 이 포스팅의 주인공은 엄연히 제냐니까요. 흐흐...
그나저나 플립 기초점 저렇게 만든 건....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뭐 그런...(먼산...)
수달 2011/05/20 15:40 #
오천원.. 우히히히히히 궁신도 참 멋진... 사람이에요. 제냐는 소치까지도 간다고 하던데 저사람 무서워요. 챈이 버티고 섰는 판국이라 어찌될지 지켜봐야겠습니다. 3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니까요..기초점은 음.... 좀 더 두고봐야 할 것 같아요. 사실 플립이 점프 메커니즘상으론 과정이 상당히 복잡한 점프라고 할 수 있는데(순방향 점프라 러츠보다 쉽다지만요) 배점이 좀 낮은 감이 있어요. 플립 점프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구현해서 랜딩해내는 선수는 오히려 러츠보다도 더 적은데 말이에요. 흠.
cava 2011/05/20 14:41 # 답글
좋은글 감사합니다^^오다는 중요한 대회마다(?) 자약룰을 위반는것 같아요. 참 신기하게도;;
점수도 예전엔 많이 달랐군요. 재미있게 잘 보고갑니다^^
수달 2011/05/20 15:43 #
중요한 대회에서는 육체를 단련하느라 머리가 하얘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타까워요. 예술성이 부족하긴 하지만 워낙 보기 편안한 점프를 뛰어서 참 좋아하는데 말이에요. 특히 랜딩 귀신이죠. 조애니와 함께 랜딩 익스텐션 대마왕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아름다운 플러츠는 좀 그렇지만요.
highenough 2011/05/20 16:03 # 답글
ㅎㄷㄷ한 궁신과 제냐의 승부였군요.. 둘다 실수하긴 했지만 프로토콜은 ㅎㄷㄷ인..오다 코치들의 표정은 정말.. 피갤을 빵 터뜨렸었죠..(..)